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월성 (문단 편집) == 구조 == 월성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름대로 [[초승달]] 내지 [[반달]] 모양 언덕 형태인데, 주변보다 높은 언덕 지역에 남쪽에는 남천이 자연[[해자]] 역할을 해서 고대에는 천혜의 요새지였을 것이다.[* 실제로 경주에 가서 남천을 보면 이런 개울물 정도로 과연 적이 못 넘어오게 막는 해자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지금 남천이 예전보다 많이 말라붙은 것이지 과거에는 월성보다 상류인 배반동 갯마을까지 배가 다닐 정도였으므로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풍부했을 것이다.] 지금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언덕처럼 보인다. 하지만 2010년대 여러 번 탐사하여 궁궐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남쪽은 남천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나머지 동, 서, 북쪽 방면은 인공 해자와 [[성벽]]으로 둘러쌌으며 그 안에 많은 궁궐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확인했다. 월성 해자는 전쟁이 사라진 삼국통일 이후로는 5호 해자 동쪽에 다듬은 석재를 활용해 석축 해자를 조성했다. 이는 정세가 안정되어 더 이상 방어 시설 본연의 역할보다는 [[동궁과 월지]] 연못처럼 [[조경]] 기능을 가진 미관을 고려한 시설로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. 이렇게 쓸모없어진 해자 일부는 신라 당대에 이미 [[고인 물]]이 오염되면서 메꿔 버렸다고 한다. 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.[* 때문에 성동동 전랑지가 [[북궁]]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.] 월성의 남쪽에 남천이 흐르므로 주작대로와 연결된 정문은 북쪽에 있다. 옛날 동아시아의 웬만한 도시들은 [[중국]]의 [[시안(도시)|장안]]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[* [[발해]]의 [[상경용천부]], [[일본]]의 [[나라시|나라]], [[교토시|교토]]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떠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.]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내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고 남쪽 중앙엔 문이 하나도 없어서[* 중국식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[[경복궁]]이나 [[자금성]]을 떠올리면 된다. 경복궁의 경우 [[경복궁 광화문|광화문]]이 정문이고 [[세종로]] 쪽이 주작대로.]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. 당연히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전 까마득한 원시시대 [[사로국]]부터 [[서라벌]]이 수도였고 자연 지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. 중대에 들어서는 나름대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해 계획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. 전체는 정사각형 36방으로, 1개 방은 작은 구획 16개로 나누었는데 각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 도로를 깔았다.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나누었다. 특히 전성기에는 바둑판식으로 된 구획 안에 기와집들이 빽빽히 차있고 거기다가 당시에는 1층이 아닌 2층 한옥들을 서로 연결했다. 현재까지 월성의 8개 층 중에서 1개 층만 발굴했는데 건물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